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내 위치는 어디인가 — 오래 버틴 사람들이 만드는 ‘현장 문화’의 힘 직장 문화는 제도보다 오래된 습관에서 만들어진다.일터 한복판에서 ‘내 위치’를 세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들어가며 : “내 위치는 어디일까?”청년 시절, 택배회사에 일일 아르바이트를 나간 적이 있었다.끝없이 쏟아지는 택배 상자를 커다란 트럭에 상차하는 일이었는데,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때 누군가 어눌한 한국말로 짜증 섞인 말을 던졌다. 요지는 ‘빨리빨리 하라’는 것이었는데, 외국 억양이 묻어나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투와 분위기만으로도 불쾌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건, 그가 힘든 상차 작업 대신 컨베이어 벨트 쪽에서 상대적으로 수월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1장 : 하루 종일 트럭에 상차하던 날궁금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했다.오래 일한 사람에게.. 더보기
슬프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 – 쇼팽이 들려주는 삶의 선율 가끔 쇼팽이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 한 곡을 틀었다가도, 이내 다음 곡을 찾게 된다. 그렇게 쇼팽의 레퍼토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쇼팽의 녹턴(Nocturnes)은 슬픔과 우울의 정서가 흐르지만, 그 안에 종종 달콤한 선율이 스며 있다. 발라드(Ballades)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장렬하고, 소나타(Sonatas)는 고전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악상으로 귀를 흔든다. 그의 음악은 단순히 장르의 이름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결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내가 쇼팽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 유려한 선율이다. 고전시대의 음악이 뚜렷한 구조를 보여준다면, 쇼팽의 선율은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부드럽게 이어진다. 둘째, 음악 전반에 깃든.. 더보기
퇴근길 버스 자리에서 배우는 삶의 의미 퇴근 후 통근버스에 앉으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온다.“피곤하다”, 그리고 “편안하다.”버스에 타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이 감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같은 직장에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말이 없다. 누군가의 휴식을 방해할 수도 있고, 스스로도 그저 조용히 쉬고 싶기 때문이다.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통근길.그 시간은 잠깐 눈을 붙이거나, 밀린 영상 하나를 보는 여유가 되기도 한다. 버스 안은 엔진 소리와 진동이 리듬처럼 이어지고, 곳곳에서 졸린 숨소리가 잦아든다. 좁고 어두운 좌석 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 하루를 내려놓는다.자리는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의미가 다르다. 출근길의 자리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 몸을 예열하는 곳이라면, 퇴근길의 자리는 지친 하루를 잠시.. 더보기
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하는가? – 슈만과의 대화 작업이 막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음악에게 묻곤 한다.“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여러 작곡가의 곡을 들어보지만, 결국 슈만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슈만의 음악은 단순한 위로나 배경음악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듣다 보면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해결되지 않던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슈만 음악의 특징 – 난해하지만 깊은 울림낭만시대의 음악가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보통 브람스, 슈베르트, 쇼팽 같은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슈만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된다.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음악이 가진 난해함이다. 악보 자체는 기교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체감 난이도 높음. 물 흐르듯 이어지다가도 예기치 못한 화성과 선율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표제음악 .. 더보기
무관도 학력도, 경력도, 성별도 묻지 않는다. 스무 살부터 예순까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월 300만 원 이상도 가능하고,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2025년 지금,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직장이다.반나절만 배우면 금세 익힐 수 있는 일.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4대 보험도 보장된다. 처음은 계약직이지만, 2년을 버티면 무기계약으로 전환되어 정년도 보장된다. 겉으로 보자면,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쩌면 “좋은 직장”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기본급은 최저시급보다 몇 백 원 높은 수준. 300만 원 이상을 벌려면 연장근무와 특근을 꼬박꼬박 해야 하고, 한 달에 고작 닷새 남짓 쉴 수 있다. 하루 종일 서서 포장하거나, 끝없이 걸어 다니거나, 무거운 .. 더보기
말러의 교향곡 현대음악으로 가는 길목은 어디일까? 조성음악의 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할 때, 나는 무조성음악을 접하며 늘 의문이 많았다. “왜 이런 음악이 나왔을까? 현대음악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답을 얻기 위해 여러 자료와 강의를 찾아다녔다. 어떤 이는 드뷔시를, 또 어떤 이는 민속음악을, 혹은 스크리아빈,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을 그 출발점으로 꼽았다.이들의 공통점은 장단조 체계를 조금씩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후기 낭만시대의 극단적인 반음계법이나, 조성 체계를 뒤흔든 바그너의 음악 역시 현대예술로 가는 한 갈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고 말하기엔 부족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작곡가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왔지만, 진정으로 시대를 바꾸는 음악가는 많.. 더보기
J. S. Bach의 Fuga 3개 이상의 성부를 어떻게 독립적인 선율로 들리게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성악가가 노래를 하거나 세 개의 다른 악기가 연주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 한 대로 한 명의 연주자가 이를 표현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아무 생각 없이 연주하면 성부는 사라지고, 화음만 남는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동시에 여러 개의 선율이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성부들을 또렷하게 들리게 하는 것이 연주의 핵심이다.예전에 바흐의 푸가를 학습할 때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교수님과 이 문제를 깊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프레이즈를 표현하는 것”. 바흐의 음악은 프레이즈가 반복되며 진행되는데, 이를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곧 다성음악 연주의 출발점이라는 것이었다.프레이즈를 설명하.. 더보기
나와 아티스트 나와 아티스트웹상에서 아티스트에 대해 찾아보면 두 가지 유형의 글이 주로 눈에 띈다. 하나는 전문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감상자의 시선은 사라지고, 음악사적 의의나 기법만 건조하게 나열된 글이다. 이런 글은 딱딱해서 음악을 들으며 느낀 인상이나 경험을 전하지 못한다.또 다른 하나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글을 문맥만 바꾼 듯한 경우다. 감상자의 목소리가 없으니 실제 경험보다는 단편적인 정보만 이어 붙인 느낌이 강하다. 음악을 충분히 듣거나 직접 연주한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예전에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 중 “나와 작곡가 누구, 나와 또 다른 누구” 라는 방식으로 작품의 의미를 풀어낸 예가 있었다. 그 질문은 자연스레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그 작품에서 무엇을 들었고, 그것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적어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