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이상의 성부를 어떻게 독립적인 선율로 들리게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성악가가 노래를 하거나 세 개의 다른 악기가 연주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 한 대로 한 명의 연주자가 이를 표현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연주하면 성부는 사라지고, 화음만 남는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동시에 여러 개의 선율이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성부들을 또렷하게 들리게 하는 것이 연주의 핵심이다.

예전에 바흐의 푸가를 학습할 때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교수님과 이 문제를 깊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프레이즈를 표현하는 것”. 바흐의 음악은 프레이즈가 반복되며 진행되는데, 이를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곧 다성음악 연주의 출발점이라는 것이었다.
프레이즈를 설명하자면, 글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문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의 기본 호흡이며, 흐름 속에서 의미를 담는 최소 단위다.
대중음악으로 예를 들면 BTS의 Dynamite 가사 중
“Shoes on, get up in the morn’ / Cup of milk, let’s rock and roll”
이 한 덩어리가 바로 프레이즈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에서는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며”
이 한 구절이 프레이즈가 된다.

바흐의 음악에서는 보통 2~4마디 정도가 하나의 프레이즈다. 이를 살리려면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 한다. 프레이즈 시작은 또렷하게 소리를 내고, 끝은 바로 직전의 음을 살짝 끊어내듯 처리하면 프레이즈가 명확하게 들리고 다음 프레이즈 시작이 구분된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이다. 다만 그 안에 담긴 음악의 정서까지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다.
바흐의 음악에는 독특한 흔적이 있다. 코랄에서 비롯된 종교적 색채, 숭고한 정서, 그리고 차분하게 다져진 예술적 깊이. 단조로 시작해도 마지막에 장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슬픔이 결국 승화되고 극복되는 듯한 울림을 준다(이를 피카르디 종지라 한다).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만, 여러 성부가 서로 얽히며 끊임없이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듣고 있으면 그 치밀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바흐의 푸가는 보통 3성이나 4성으로 쓰였다. 이는 세 개 혹은 네 개의 독립적인 선율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뜻이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2권에 실린 전주곡과 푸가(각 권 24쌍, 총 48곡)만 들어도 바흐 음악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알 수 있다. 특히 모든 조성을 아우른 이 작업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쇼팽,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야빈, 드뷔시 등은 각기 24개의 조성을 담은 전주곡을 썼고, 베토벤 역시 만년에 푸가에 깊이 몰입했다.

결론
바흐의 푸가는 단순히 여러 성부가 얽힌 복잡한 음악이 아니다. 각 성부가 저마다의 호흡을 지니고 서로 대화하며,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엄격하게 조화를 만들어낸다. 연주자에게는 프레이즈를 살려 성부를 독립적으로 들리게 하는 섬세함을 요구하고, 듣는 이에게는 절제 속에서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바흐의 푸가는 학문적인 연구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일상 속에서 위로가 되는 음악이다. 복잡한 듯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안정과 평화를 발견한다. 반복되는 선율 속에서 묘한 균형과 위안을 주는 힘, 그것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바흐의 푸가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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