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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무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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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도, 경력도, 성별도 묻지 않는다. 스무 살부터 예순까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월 300만 원 이상도 가능하고,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2025년 지금,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직장이다.

반나절만 배우면 금세 익힐 수 있는 일.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4대 보험도 보장된다. 처음은 계약직이지만, 2년을 버티면 무기계약으로 전환되어 정년도 보장된다. 겉으로 보자면,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쩌면 “좋은 직장”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누구나 지원하고, 들어갈 수 있는 직장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기본급은 최저시급보다 몇 백 원 높은 수준. 300만 원 이상을 벌려면 연장근무와 특근을 꼬박꼬박 해야 하고, 한 달에 고작 닷새 남짓 쉴 수 있다. 하루 종일 서서 포장하거나, 끝없이 걸어 다니거나, 무거운 박스를 나르는 일. 단순한 일이라 금방 배우지만, 몸은 매일 고단하다. 쉬는 시간은 법으로 보장된 만큼만 주어지고, 속도가 느리면 불려가 지적을 받거나 더 힘든 일을 배정받는다. 사람이라기보다 기계의 부속품 같은 취급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속도가 더 중요하다. 물량은 반드시 내일까지 고객에게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협력보다는 효율이, 존중보다는 정확함이 우선된다. 관리자는 마감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방송으로 계속 업무 요령을 강조한다. 속도가 느린 이는 호출당한다. 이곳에서 중요한 건 사람의 삶이 아니라, 물류의 흐름이다.

일은 우리가 기계가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장은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취업이 막힌 40~50대, 경쟁에 지쳐 포기한 청년들, 사업 실패로 오갈 곳 잃은 자영업자, 그리고 작가나 예술가처럼 전문성은 있지만 수입이 불안정한 이들까지… 이곳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반년쯤 지나면 어느새 적응하게 된다. 다른 길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이곳에 눌러앉는다. 일이 익숙해지면 크게 혼날 일은 없고, 돈이 필요할 때는 시간을 더 들여 일하면 된다. 월급은 제때 나온다. 동료들과 친분이 쌓이면 일터도 조금은 따뜻해진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며, 이곳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삶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한 청년은 30대 초반에 들어와 어느덧 5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곧 마흔을 앞두고 있지만, 새로운 도전을 꿈꾸지 못한 채 익숙함 속에 머물러 있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몸은 적응했고, 다른 길을 상상할 힘은 사라졌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간도(無間道)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이 직장을 ‘무관도(無關道)’라 부르고 싶다. 학력, 경력, 성별이 무관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일단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어렵고,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잃어버리기 쉬운 곳.

무관도는 지옥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달콤하다. 그러나 그 달콤함이 사람을 묶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가끔 두렵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조금씩 다른 모습의 무관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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