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이 막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음악에게 묻곤 한다.
“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
여러 작곡가의 곡을 들어보지만, 결국 슈만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슈만의 음악은 단순한 위로나 배경음악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듣다 보면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해결되지 않던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슈만 음악의 특징 – 난해하지만 깊은 울림
낭만시대의 음악가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보통 브람스, 슈베르트, 쇼팽 같은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슈만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음악이 가진 난해함이다. 악보 자체는 기교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체감 난이도 높음. 물 흐르듯 이어지다가도 예기치 못한 화성과 선율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표제음악 같다가도 절대음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인간 내면을 정면으로 드러내며 청자를 깊은 성찰로 이끈다.
흔히 사람들은 슈만의 난해함을 그의 정신적 고통이나 질병과 연결짓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순화하는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슈만의 음악에는 철학적 사색, 풍부한 독서, 드라마틱한 사랑, 젊은 시절의 진로 고민, 그리고 손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쉬움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그의 작품을 독특하고도 심오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슈만의 작품들
가곡 –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 Op. 48) / 여인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 leben, Op. 42)
슈만은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감각을 동시에 지닌 예술가였다. 그의 가곡에서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목소리와 함께 감정을 나누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 시인의 사랑은 남성의 시선에서 사랑과 이별, 회상의 감정을 노래한다.
• 여인의 사랑과 생애는 한 여성이 느끼는 사랑, 출산의 기쁨, 남편과의 사별까지 삶의 전 과정을 담아낸다.
피아노 소품 – 숲의 정경 (Waldszenen, Op. 82) / 어린이 정경 (Kinderszenen, Op. 15)
악보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세계가 담겨 있다.
• 숲의 정경은 시인 아이헨도르프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으며, 숲의 밝음과 어두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을 모두 품고 있다.
• 어린이 정경은 슈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쓴 곡으로, 따뜻함과 애틋함이 묻어난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아이의 눈과 어른의 시선이 동시에 겹쳐져 있다.
크라이슬레리아나 (Kreisleriana, Op. 16)
슈만의 대표적인 난해한 피아노 작품이다. 아름다운 선율이 이어지다가도 갑자기 격렬한 정서가 치고 들어오며, 마치 소설 속 인물의 내면이 음악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단순한 기교를 넘어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표현하는 곡이기에, 많은 연주자들이 도전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남겼다.
첼로 협주곡 (Cellokonzert, Op. 129)
슈만이 만년에 남긴 작품으로, 첼로 특유의 따뜻하고 그윽한 음색 속에서 슬픔과 애절함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오케스트라와 첼로가 주고받는 대화는 그의 가곡을 연상시키며, 시적인 정서와 함축성을 담고 있다.
마무리 – 슈만이 주는 질문
슈만의 음악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난해함은 단순히 정신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깊은 철학과 풍부한 경험이 빚어낸 복합적 울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단순한 선율을 넘어, 인간의 삶과 내면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작업이 막힐 때,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슈만을 찾는다. 그의 음악이 내게 건네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너는 지금, 무엇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가?”
추천연주
첼로 협주곡 (Cellokonzert, Op. 129)
→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 베를린 필
숲의 정경 (Waldszenen, Op. 82)
어린이 정경 (Kinderszenen, Op. 15)
– 백건우 (Kun-Woo Paik)
크라이슬레리아나 (Kreisleriana, Op. 16)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 Op. 48)
– 프리츠 분더리히 (Fritz Wunderlich)
여인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 Op. 42) –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Elisabeth Schwarzko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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