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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교양

사랑과 죽음의 경계에서 –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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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자락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하는 음악을 찾게 된다. 화려하거나 감각적인 곡보다, 듣는 이의 내면을 천천히 파고드는 음악. 그럴 때 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떠올린다.

이 작품은 단순한 오페라가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곧 죽음이라는 모순된 진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욕망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거대한 심리극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바그너라는 이름 앞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오랫동안 바그너의 삶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예술적 천재성은 인정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그저 무한 선율과 라이트모티프, 그리고 극단적인 반음계적 화성이라는 개념만 단편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그가 남긴 대표작들은 대부분 대규모 악극이었다.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같은 작품들.

그러나 독일어라는 언어적 장벽은 내게 늘 부담이었다.
가사의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니 감상이 어디선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음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브람스와 함께 낭만주의를 양분하는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 들은 작품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었다.

음악이론 교재마다 등장하는 ‘트리스탄 화음’의 실체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화음을 직접 들은 순간, 나는 왜 이 작품이 시대의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무한선율, 그리고 끝나지 않는 긴장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무한선율(Endless Melody)’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
선율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며, 종결의 화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음악은 늘 어떤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특히 유명한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 은
19세기 조성 체계를 무너뜨린 상징적인 순간으로 기록된다.
해결되지 않은 긴장감, 방향을 잃은 화성 — 그 안에는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불안과 열망이 담겨 있다.



내가 느낀 점


1️⃣ 대본과 음악의 완벽한 결합
가사의 의미와 오케스트라의 표현이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음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대본의 감정선을 따라 녹아든다.

2️⃣ 극단적 완벽주의
대본과 음악을 모두 직접 쓴 바그너는, 언어와 음악이 하나의 문법 안에서 움직이도록 설계했다. 그래서 그의 악극에는 여백이 거의 없다. (물론 이것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3️⃣ 후기낭만주의의 포문
과감한 화성 진행, 반음계의 연속, 금관의 적극적인 사용.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고, 강렬하며, 과장될 만큼 정교하다.

4️⃣ 길다. 정말 길다.
한 장면 한 장면이 하나의 교향시처럼 느껴질 만큼 밀도가 높다. 그러나 그 길이는 곧 그의 세계관의 크기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상황을 잘 묘사한다

사랑은, 결국……(스포주의)








이졸데는 독을 통해 트리스탄과 함께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그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완성이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랑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영원해지는 것.

바그너는 그 과정을 세 막에 걸쳐 숨 막히는 긴장과 해방으로 그려낸다. 이졸데가 마지막에 부르는 ‘사랑의 죽음(Liebestod)’ 은 현실의 고통을 초월한 완전한 합일의 순간이다.


(낭만시대 오페라는 유독 이런 비극이 많을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들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날엔 절망의 노래로, 또 어떤 날엔 구원의 서사로 들린다. 그건 아마도 각자의 사랑과 상처, 욕망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해석보다 ‘몰입’이 필요하다.
음악 속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만약 언어가 어렵다면 가사 해석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집중해보자. 그것으로도 충분히 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바그너의 음악이 가지는 마력이다.



덧붙여서

올겨울, 국립오페라단이 예술의전당에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직접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다면,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의 파도와
두 성악가의 외침이 한순간의 예술로 완성되는 장면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함께 들어보면 좋은 작품
• 바그너 《파르지팔》(Parsifal) – 구원과 초월의 주제를 이어가는 후기작
• 말러 교향곡 9번 – 죽음과 이별의 정서를 교향적으로 확장한 작품
• R. 슈트라우스 《살로메》 – 욕망과 파멸의 또 다른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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